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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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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천 전투는 1950년 11월 한국 전쟁 중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에 맞서 영국 연방 제27여단과 호주 제3대대가 박천 지역에서 벌인 전투이다. 중국군이 청천강 방어선을 돌파한 후, 유엔군은 박천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고, 호주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중국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호주군은 고지를 점령하며 격렬한 전투를 벌였지만, 지휘관의 철수 명령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기도 했다. 전투 결과 양측 모두 피해를 입었으며, 호주군은 박천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전투 명예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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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한국 전쟁
전투박천 전투
시기1950년 11월 5일
장소박천, 북한
결과유엔군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유엔군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교전 2중국
북한
지휘관
지휘관 1Basil Aubrey Coad
Floyd Walsh
Howard M. Moore
지휘관 2Wu Xinquan
Zhang Jiecheng
부대
부대 1제27영국연방여단
오스트레일리아 왕립 제3대대
아가일 & 서덜랜드 고지인 연대 제1대대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
부대 2중국 인민해방군 제117사단
전력
전력 1약 300명
전력 2약 1,500명
피해 규모
피해 1사망: 14명
부상: 84명
피해 2사망: 270명 (추정)
부상: 200명 (추정)

2. 배경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38선을 넘어 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3] 국제 연합은 한국을 돕기 위해 개입을 결정하고 회원국들에게 파병을 요청했다.[4] 미국 지상군이 투입되었으나, 병력과 장비 부족으로 8월 초 부산 교두보로 밀려났다.[5]

호주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에 초기에 부대를 파견한 국가 중 하나로, 영국 연방 점령군의 일환으로 일본에 주둔하던 제77 비행대 RAAF의 P-51 머스탱 전투기와 함정이 투입되었다. 제3 대대, 왕립 호주 연대 (3 RAR)는 1950년 9월 28일 부산에 도착하여,[9] 홍콩에서 급파된 제27보병여단에 합류하여 미 제8군을 지원했다.[11]

바실 오브리 코드 준장이 지휘하는 제27영연방여단은 제1대대, 아길과 서덜랜드 하이랜드 연대(1 ASHR), 제1대대, 미들섹스 연대(1 MR), 그리고 3 RAR로 구성되었다. 영국 대대들은 병력 부족으로 각각 600명 정도였고, 여단은 자체 포병 지원이 없어 미국에 의존했다.[12]

3 RAR이 전선에 도착했을 때, 조선인민군은 인천 상륙 작전과 부산 교두보 돌파로 인해 궤멸되어 후퇴하고 있었고, 유엔군은 북진하여 38도선을 향해 진격했다.[11][13] 제27영연방여단은 호바트 R. 게이 소장의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10월 16일 북한 진격의 선두에 섰다.[14]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압록강을 건너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팽덕회 원수 지휘 하에 18개 사단이 투입되었으나, 미군과 한국 정보 기관은 이를 탐지하지 못했다.[24][25] 10월 16일, 중국인민지원군 제13집단군이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진입했고, 11월 초에는 제9집단군 소속 12개 사단이 증원되어 총 38만 명, 30개 사단 규모가 되었다.[24][25]

중국인민지원군은 온정 전투에서 대한민국 제2군단을 괴멸시키고, 운산 전투에서 미 제8기병연대를 포위하여 격파하는 등 초기 공세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26] 청주는 제27영연방여단의 최북단 진격 지점이었으며, 11월 1일 여단은 박천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2][27] 장제청이 지휘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제117사단은 박천의 도로 분기점을 차단하여 유엔군을 포위하려 했다.[1][2] 팽덕회는 중국 제39군에 "용산동-박천과 용비령-안주 도로를 차단하고, 적의 도주를 막고, 적을 포위해야 한다..."라는 명령을 내렸다.[2]

월턴 워커는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에 대응하여 청천강과 대령강 북쪽에 주둔하기로 결정했고, 코드 준장은 청천강 교두보의 좌측 전선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5] 제27영연방여단은 대령강과 청천강 하류 도하 지점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박천 지역에 집중했다.[36][30]

2. 1. 군사적 상황

한국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을 기습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3] 수적으로 우세하고 장비가 더 좋았던 조선인민군은 38도선을 넘어 빠르게 남하하여 대한민국 육군을 압도했다. 국제 연합은 한국을 돕기 위해 개입을 결정하고 회원국들에게 파병을 요청했다.[4] 미국 지상군이 한국군 붕괴를 막기 위해 긴급 투입되었으나, 병력과 장비 부족으로 8월 초 부산 교두보로 밀려났다.[5]

지도를 보여주는 지도 미군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있다
유엔군의 압록강으로의 진격 지도, 1950


호주더글러스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에 초기에 부대를 파견한 국가 중 하나였다.[9] 영국 연방 점령군의 일환으로 일본에 주둔하던 제77 비행대 RAAF의 P-51 머스탱 전투기와 함정이 투입되었다. 제3 대대, 왕립 호주 연대 (3 RAR)는 호주로 복귀 예정이었으나, 1950년 9월 23일 한국으로 이동하여 9월 28일 부산에 도착했다.[9] 3 RAR은 홍콩에서 급파된 제27보병여단에 합류하여 월턴 워커 중장이 지휘하는 미 제8군을 지원했다.[11] 바실 오브리 코드 준장이 지휘하는 제27영연방여단은 제1대대, 아길과 서덜랜드 하이랜드 연대(1 ASHR), 제1대대, 미들섹스 연대(1 MR), 그리고 3 RAR로 구성되었다. 병력 부족으로 영국 대대들은 각각 600명 정도였고, 여단은 자체 포병 지원이 없어 미국에 의존했다. 3 RAR의 합류는 여단에 전술적 역량을 더했고, 호주군이 미군 부대가 아닌 익숙한 조직에서 활동할 수 있게 했다.[12]

3 RAR이 전선에 도착했을 때, 조선인민군은 인천 상륙 작전과 부산 교두보 돌파로 인해 궤멸되어 후퇴하고 있었다.[13] 유엔군은 북진하여 38도선을 향해 진격했다.[11] 제27영연방여단은 호바트 R. 게이 소장의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되어, 10월 16일 북한 진격의 선두에 섰다. 조선인민군은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강력히 저항했다.[14] 제27영연방여단은 10월 17일 사리원을 점령했다.[15] 10월 21일, 영국군과 호주군은 존 H. 처치 소장의 미 제24보병사단 지휘 하에 청주 점령 명령을 받았다.[16][17]

유엔군은 영주를 거쳐 압록강으로 진격했다.[18][19] 10월 24일, 맥아더는 압록강 이남 이동 제한을 해제하고, 미국 합동 참모 본부 지시를 무시하며 진격을 준비했다.[20] 10월 25일, 3 RAR은 대령강을 건넜다.[20] 다음날 구진에서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큰 피해를 입히고 교두보를 방어했다.[19] 제27영연방여단은 청주로 진격했으나, 중국-북한 국경에 접근하며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20] 10월 29일부터 30일까지 3 RAR은 청주 전투를 치렀다.[22]

A long orderly line of heavily laden soldiers marching in pairs away from the camera down a road across an open expanse
중국군이 압록강을 건너고 있다.


청천강 전투 이후, 미 제21보병연대는 서쪽 선천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11월 1일, 미군은 압록강에서 30km 떨어진 청고동에서 조선인민군 기갑 부대와 충돌했다. 북쪽에서는 미 제5보병연대와 제9보병연대가 태천과 구성을 확보하고 만주 국경에서 40km 이내로 진격했다.[23] 그러나 10월 말, 펑더화이 원수 지휘 하에 18개 사단의 중국인민지원군(PVA)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인민군을 지원했다. 10월 16일, 중국인민지원군 제13집단군이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100km까지 진입했고, 11월 초에는 제9집단군 소속 12개 사단이 증원되었다. 총 38만 명, 30개 사단이 투입되었다.[24][25] 중국인민지원군은 온정에서 대한민국 제2군단을 격파하고, 운산에서 미 제8기병연대를 포위했다.[26] 미 제24보병사단은 청천강으로 후퇴했고, 제27영연방여단도 남쪽으로 이동했다.[27]

청주시는 제27영연방여단의 최북단 진격 지점이었다. 11월 1일, 여단은 박천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2][27] 장제청 지휘 하의 중국인민지원군 제117사단은 박천의 도로 분기점을 차단하려 했다.[1][2] 한편, 중국인민지원군 제38군과 제40군은 동쪽에서 청천강을 따라 접근했다.[39] 3RAR은 청주시에 남아 고립되었으나, 11월 2일 미군 트럭으로 남쪽으로 이동하여 대령강 강바닥에 주둔했다.[29][30]

"용산동과 용비령의 적을 점령하기 위해 과감하게 침투하여 용산동-박천과 용비령-안주 도로를 차단하고, 적의 도주를 막고, 적을 포위해야 한다..."
팽덕회가 중국 제39군에 내린 명령.[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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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턴 워커는 청천강과 대령강 북쪽에 주둔하기로 결정했고, 코드는 청천강 교두보 좌측 전선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5] 제27영연방여단은 대령강과 청천강 하류 도하 지점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박천 지역에 집중했다.[36][30] 미들섹스는 마을과 북쪽 및 동쪽 고지를 점령했고, 제3RAR과 아가일 연대는 대령강 서쪽 접근로를 방어했다.[37] 제3RAR은 마을에서 1.5km 서쪽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30] 아가일 연대 B, C중대는 구진 근처 다리 건너편 대령강에 교두보를 형성했고, A중대는 남쪽 도로에 진지를 점령했다. 우측에는 미 제24보병사단이 안주의 청천강 도하 지점을 방어했고, 대한민국 제2군단은 더 동쪽에 진지를 지켰다.[39][40] 넓은 전선으로 인해 유엔군 진지는 약화되었고, 제27영연방여단과 가장 가까운 미군 부대 사이에 9.5km의 간격이 생겼다.[39]

2. 2.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압록강을 건너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팽덕회 원수 지휘 하에 18개 사단이 투입되었으나, 미군과 한국 정보 기관은 이를 탐지하지 못했다.[24][25] 10월 16일, 중국인민지원군 제13집단군이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진입했고, 11월 초에는 제9집단군 소속 12개 사단이 증원되어 총 38만 명, 30개 사단 규모가 되었다.[24][25]

중국인민지원군은 온정 전투에서 대한민국 제2군단을 괴멸시키고, 운산 전투에서 미 제8기병연대를 포위하여 격파하는 등 초기 공세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26] 이로 인해 미 제24보병사단은 청천강으로 후퇴했고, 영연방 제27여단도 남쪽으로 이동했다.[27]

청주는 제27영연방여단의 최북단 진격 지점이었으며, 11월 1일 여단은 박천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22][27] 장제청이 지휘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제117사단은 박천의 도로 분기점을 차단하여 유엔군을 포위하려 했다.[1][2] 팽덕회는 중국 제39군에 "용산동-박천과 용비령-안주 도로를 차단하고, 적의 도주를 막고, 적을 포위해야 한다..."라는 명령을 내렸다.[2]

월턴 워커는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에 대응하여 청천강과 대령강 북쪽에 주둔하기로 결정했고, 코드 준장은 청천강 교두보의 좌측 전선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5] 제27영연방여단은 대령강과 청천강 하류 도하 지점을 방어하라는 명령을 받고 박천 지역에 집중했다.[36][30] 제1대대, 미들섹스 연대는 마을과 북쪽 및 동쪽 고지를 점령했고, 제3대대, 왕립 호주 연대 (3 RAR)과 제1대대, 아길과 서덜랜드 하이랜드 연대는 대령강 서쪽 접근로를 방어했다.[37]

3. 전투

1950년 11월 4일부터 11월 5일까지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과 조선인민군은 박천 일대에서 제24보병사단과 영국 연방 제27여단을 공격했다. 특히, 11월 5일 새벽, 중공군은 미 제61야전포병대대 C포대를 공격하여 안주로 가는 도로를 차단하고, 영국 연방 제27여단의 보급 및 철수 경로를 위협했다.[37][44] 바실 코드 준장은 아가일 연대를 투입하여 상황을 회복하려 했다.[31][45]

아가일 연대는 M4 셔먼 전차와 미국 공군의 지원을 받아 중공군을 격퇴하고 도로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46] 그러나 중공군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영국 연방 제27여단은 제한적인 철수를 결정했다.[53]

한편, 호주 제3대대는 11월 5일 오후, 대령강 동쪽의 조선인민군 진지를 공격했다.[50] 호주군은 제77비행대 RAAF 소속 P-51 무스탕 전투 폭격기의 지원을 받으며 2시간여의 격전 끝에 목표를 달성했다.[54] 그러나 이 과정에서 호주군도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다.[57]

1950년 11월 5일 박천에서 작전 중인 호주군 박격포 부대


11월 5일 밤, 중공군은 호주 제3대대를 다시 공격했고, 월시 중령은 부대 전체를 잃을 것을 우려하여 철수를 명령했다.[1] 이 결정은 전술적 실수로 평가되며, 영국 연방 제27여단의 좌측면을 노출시킬 위험을 초래했다.[1] 코아드 준장은 월시 중령에게 즉시 재배치를 명령했지만, 이는 불가능했다.[1]

11월 6일 새벽, 중공군의 공격은 저지되었고, 호주군은 새로운 위치로 재배치되었다.[1] 그러나 이 과정에서 호주군은 12명이 사망하고 64명이 부상당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1] 코아드 준장은 월시 중령을 해임하고 브루스 퍼거슨 소령을 새로운 지휘관으로 임명했다.[1]

1950년 11월 7일, 3 RAR 지휘를 맡은 직후의 퍼거슨


11월 6일 오후, 박천 주변의 중공군 철수는 일반적인 철수의 일부임이 분명해졌다.[1]

3. 1. 초기 공방전 (1950년 11월 4일 ~ 5일)

1950년 11월 4일11월 5일 밤 사이,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과 조선인민군은 미국 제24보병사단에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다.[22] 새벽 전, 제19연대 전투단은 격렬한 전투에 휘말렸고,[41] 약 2km 후퇴했다. 중공군은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대령강과 청천강 사이로 진격하며 박천-신안주 도로를 차단하여 영국 연방 제27여단의 후방을 위협했다.[22] 전날 오후, 미들섹스 연대 정찰대는 북동쪽 9.6km 지점에서 대규모 중공군 정찰대와 교전하여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주요 중공군 공격은 다음날 아침 일찍 시작되었다.[40][42] 한편, 남쪽으로 이동하는 많은 난민들은 영국군과 호주군에게 중공군이 난민을 이용하여 위치에 침투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더했다.[43]

11월 5일 08:00, 약 200명의 중공군이 영국 연방 제27여단에 배속된 미 제61야전포병대대 C포대를 공격했다.[31] 미국 포병은 박천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도로 옆에서 여단을 지원하고 있었으며, 구진의 아가일 연대 본부에서 남쪽으로 1.8km 떨어진 중요한 콘크리트 다리를 보호하고 있었다.[22] 중공군은 미국 포병 진지와 인근 다리를 공격하기 전에 이 지역에 여러 길목을 차단했다.[37] 이 공격으로 안주로 가는 도로가 끊겼는데, 이는 영국 연방 제27여단의 유일한 보급 또는 철수 수단이었고, 청천강을 건너는 유일한 통로를 노출시켰다.[44]

준장 바실 오브리 코드는 중공군이 포병 진지에서 제거되고 언덕이 확보되지 않으면 여단이 포위되어 고립될 위험에 처하고 안주에서 교차로가 상실될 뿐만 아니라 미 제19연대 전투단도 위협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다.[45] 이에 조지 닐슨 중령의 지휘 하에 아가일 연대가 상황을 회복하기 위해 파견되었다.[31] B 및 C 중대는 대령강 서쪽 제방에서 철수하여 A 중대를 증원한 후 미국 전차의 지원을 받아 차례로 남쪽으로 공격할 예정이었다. 동시에 알렉산더 윌슨 소령 지휘 하의 A 중대는 즉시 북쪽으로 공격하여 도로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두 부대가 우발적으로 교전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임시 통제 조치가 마련되었고, 08:40에 항공 지원이 요청되었다. 윌슨의 병사들은 두 대의 미국 트럭을 징발한 후 4대의 미국 M4 셔먼 전차의 지원을 받으며 출발했다.[46]

한편, 북쪽에서는 하워드 M. 무어 대위의 지휘 하에 미 제61야전포병대대 C포대가 105 mm M2A1 곡사포 6문을 반원 형태로 배치하고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자동 화기로 강력하게 방어했다. 동쪽에서 공격해온 중공군은 은폐를 위해 여러 개의 개울과 논둑을 이용하여 포병 진지에 침투하려 했다.[46] 미군 곡사포 한 문이 각도를 낮춰 접근전에서 가늠자를 통해 사격하여 얼어붙은 논밭에 포탄을 튕기게 하여 공격 부대 사이에서 폭발시켰다. 45분 후 두 번째 곡사포가 방향을 돌려 첫 번째 곡사포의 사격을 증강했다. 미군은 45m에서 270m 거리에서 1,400발을 소모했지만, 화력으로는 공격 부대를 저지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47] 상공의 관측기에서 지원 사격이 가해져 중공군의 맹공을 잠시 멈추게 했다. 소화기 탄약이 부족하고, 곡사포 1문이 파괴되고 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당한 미군은 궤멸될 위기에 직면했다.[46] 포병들은 다리에서 불과 18m 떨어진 곳에서 중공군 폭파반 대원을 사살했다.[47]

마침내 아가일 연대의 B 및 C 중대가 일렬로 대령강을 건너 사격을 받으며 미들섹스 연대의 기관총 사격을 지원받아 도로를 체계적으로 확보하기 시작했고, A 중대도 계속 진격했다.[48] 09:00에 구원군의 선두 전차와 보병이 도착했고, A 중대의 나머지 병력이 바짝 뒤따랐다. 아가일 연대는 신속하게 포병 진지를 확보했고, 중공군은 인근 언덕으로 철수하는 동안 미국 전차들이 계속 교전했다.[46] 포병 진지 근처에서 70명 이상의 중공군 시체가 발견되었지만, 중공군은 새로운 위치에서 도로를 계속 장악했다.[47][49]

도로를 개통하기 위해 아가일 연대는 도로 동쪽 500m에서 1000m에 위치한 고지에서 중공군을 제거하기 위해 이동했다.[48] 약 45m 높이의 이 언덕은 서쪽으로 대령강까지의 논밭을 가로질러 시야를 확보하고 강 옆으로 뻗어 있는 박천-신안주 도로를 장악했다.[22] 4대의 셔먼 전차, 기관총 및 박격포의 지원을 받아 A 중대는 10:00에 언덕을 점령했다.[48] 윌슨은 증강된 소대로 정상에 주둔한 후 중대의 나머지 병력을 도로로 철수시켜 3인치 박격포와 비커스 중기관총 사격을 준비했다.[46] 한편, 앨러스터 고든-잉그램 소령의 지휘 하에 B 중대는 여러 대의 미국 전차의 지원을 받아 두 번째 중공군 길목을 공격했다. 다시 작전에 투입된 C포대의 포병들도 영국 보병을 지원했으며, 고든-잉그램이 부상당한 격렬한 교전 끝에 중공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많은 시체를 도로에 남겨두었다. 이들 중 일부는 안주의 다리에 사용할 것으로 보이는 폭파 장약을 휴대하고 있었다. 전투 생존자들이 언덕으로 이동하는 것을 본 닐슨은 B 및 C 중대에게 도로를 보호하기 위해 동쪽 측면에 위치를 잡도록 명령했다.[46]

중공군이 포병 진지와 박천 주변 언덕에서 제거되었지만, 남쪽에서의 추가 공격은 영국 연방 제27여단의 위치를 계속 위협했고, 그 위치는 위험했다.[50] 전투는 계속되었고, 11:00에 중공군은 A 중대 전초 기지에 대한 대규모 반격을 가해 6명이 부상당했다. 아가일 연대는 도로에 배치된 2대의 비커스 기관총의 지속적인 사격의 엄호 하에 고지에서 철수해야 했고, 역사면에 묶였다.[51][52]

아침 내내 미국 공군 (USAF) LT-6G 모스키토 경관측기가 영국 연방 제27여단 후방의 언덕에 중공군이 계속 집결하는 것을 감시했으며, 그 병력은 약 1개 사단으로 추정되었다.[47] 중공군이 밤 동안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이동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필요한 것보다 더 앞으로 남아 있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한 코드는 제한적인 철수를 승인해달라고 요청했다.[53] 그는 대령강을 건너 전진 부대를 철수시키고 안주 근처의 청천강 방향으로 남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31]

3. 2. 호주 3 RAR의 고지 공격 (1950년 11월 5일)

호주 제3대대는 11시 30분에 대령강을 건너 박천으로 가는 도로 동쪽 1km 지점과 매정동 북쪽 2km 지점의 조선인민군 진지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50] 이를 지원하기 위해 제77비행대 RAAF 소속 P-51 무스탕 전투 폭격기 4대가 인민군을 로켓과 기관총으로 공격했는데, 이는 한국 전쟁 중 호주 항공기가 3 RAR을 지원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였다.[54] 능선에는 남동쪽으로 뻗은 세 개의 주요 봉우리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도로와 가장 가깝고, 두 번째는 바로 뒤에 있으며, 세 번째는 더 뒤쪽에 있었다. 인민군은 처음 두 곳을 점령하고 있었다.[52] 아가일 연대가 아침에 잠깐 능선을 점령했지만, 인민군에게 밀려났다.

3 RAR이 편성을 하고 있는 동안 박격포 사격이 가해졌지만, 도로를 출발선으로 삼아 대대 공격은 14시 시작되었고, A 중대는 좌익, B 중대는 우익을 맡아 각각 2개 소대가 전진하고 1개 소대는 예비로 배치되었으며, 각 소대는 총검을 착검하고 널리 펼쳐진 종대로 배치되었다.[50][55] A 중대는 빌 치츠 대위가 지휘했고, B 중대는 조지 설웰 소령이 2일 전 차량 사고로 다리를 다쳐 대시 라플린 대위가 지휘했다.[50] 박격포 소대는 도로 옆 대대 본부와 함께 배치되었으며, 비커스 기관총 2개 분대와 대전차 소대 소속 17파운더 대전차포 2문이 배치되었다. 공격 선봉 소대는 지역 방어를 제공했고, 박격포는 기관총 및 언덕을 공격하기 시작한 전차와 함께 인민군 박격포 사격을 막기 위해 지속적인 포격을 가했다.[56]

호주군은 진격을 시작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고,[55] 처음에 인민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등반을 시작하면서 남쪽과 동쪽의 높은 지점에서 맹렬한 소화기 사격을 받았다.[53] 500m의 탁 트인 논밭을 가로질러 오랫동안 접근한 후, A 중대는 포위된 아가일 연대를 구원했다.[52] 그러자 인민군은 두 호주 중대가 50m 봉우리를 점령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도록 만들었다.[30] 호주군은 포병 지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대의 자체 지원 무기,[50] 3인치 박격포와 중기관총, 그리고 도로 근처에서 원거리 지원을 제공하는 셔먼 전차 4대에 의존했다.[53] A 중대와 B 중대가 치열하게 교전하자 왈시는 월터 브라운 소령의 지휘하에 D 중대를 우익을 강화하기 위해 남쪽 언덕을 공격하도록 이동시켰다. A 중대는 첫 번째 봉우리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하여 인민군을 몰아냈고, 브렌 경기관총과 비커스 중기관총의 지원 사격으로 B 중대가 오른쪽으로 이동하여 두 번째 봉우리를 점령할 수 있었다.[57]

마침내 16시에 호주군은 2시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결연한 방어에 맞서 목표를 달성했다.[50] A 중대와 B 중대는 인민군의 반격을 준비했다.[58] 한편, Archer Denness 대위가 지휘하는 C 중대는 대대 본부 및 지원 중대와 함께 도로에서 예비대로 남아 있었다.[30][59] 공격 명령이 서둘러 이루어졌고 세부 사항이 부족했으며, 방어군의 규모도 알 수 없었지만, 공격군은 승리하여 제한된 공격 지원만으로 능선을 확보했다.[30]

전투 중 B 중대 소대 지휘관 중 한 명인 에릭 라르센 중위는 일주일 전 구진에서 도하 작전을 이끌었지만 사망했다.[53] 분대 지휘관 중 한 명인 제프 존스 하사는 즉시 제5소대 공격을 지휘하며 가파른 경사면을 가로질러 분대에서 분대로 이동하며 사격을 지시했는데, 이는 인민군의 맹렬한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 중에도 이루어졌다. 그는 이러한 행동으로 미국 은성 훈장을 받았다.[50] 성공적인 공격으로 남쪽 도로가 열리면서 미들섹스 대대, 여단 본부 및 다수의 지원 부대가 호주군을 통해 도로를 따라 철수하고 아가일 연대가 뒤따랐다.[30][50] 3 RAR은 영국 대대가 새로운 진지를 점령하는 동안 후방 경계로 남았고, 안주에서 청천강 도하를 엄호했다.[60] 인민군의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은 3 RAR에 계속 떨어졌고, 17시에 포탄 한 발이 A 중대 본부를 파괴하여 2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치츠도 부상자 중 한 명으로 들것에 실려 후송되었다.[57]

3. 3. 월시 중령의 철수 명령과 논란 (1950년 11월 5일 ~ 6일)

中國人民志願軍중국어 (PVA)은 1950년 11월 5일 밤, 해가 지고 한 시간 후, 마전동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박천 도로를 따라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호주군 제3 왕립연대(3 RAR)의 C 중대를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기관총 사격은 남쪽으로 400m 떨어진 지원 중대와 연대 본부에도 가해졌다. 월시 중령은 본부를 900m 뒤로 재배치하기로 결정했다. PVA 보병은 어둠 속에서 논밭을 가로질러 C 중대를 공격하는 동시에, 오후에 점령했던 언덕을 지키고 있던 A 중대와 B 중대에도 공격을 가했다.[1]

PVA의 맹렬한 반격에 월시 중령은 부대 전체를 잃을까 두려워했고, 20:00에 일반 철수를 명령하여 코아드 준장에게 알리지 않고 연대를 도로에 집중시키기 위해 능선에서 병력을 철수시켰다. 이 결정은 심각한 전술적 실수였는데, PVA는 종종 도로 양쪽의 능선을 지키는 데 실패한 채 언덕을 가로질러 이동하여 도로에 갇힌 유엔군을 포위하는 데 능숙했고, 그 결과 앞뒤로 강력한 집중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철수는 영국 연방 제27여단의 왼쪽 측면을 노출시킬 위험이 있었다. 코아드 준장은 월시 중령에게 즉시 중대를 능선에 재배치하라고 명령했지만, 이는 달성 불가능했다.[1]

오후에 치츠가 부상을 입은 후 로렌스 클라크 중위가 지휘하게 된 A 중대는 혼란스러운 철수 중에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PVA와의 접촉을 겨우 끊는 데 성공했다. B 중대도 언덕 아래로 싸워 내려가야 했다. 두 중대는 이전 위치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다시 싸워 올라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호주군이 어둠 속에서 그 지형을 되찾기에는 너무 늦었고, PVA의 공격 강도는 계속 증가했다. 남쪽 오른쪽 측면에 있던 D 중대만은 공격을 받지 않아 언덕 63번지에서 이전 위치를 되찾을 수 있었다. A 중대와 B 중대가 이전에 점령했던 위치는 더 많은 수의 PVA에 의해 점령되었고, 3 RAR의 나머지 병력은 대신 철도 건널목에 집중했다. 22:00에 코아드 준장은 포격과 박격포로 포기된 능선을 공격하도록 준비했고, 미들섹스 연대에서 파견된 정찰대는 새로운 PVA 공격에 대비하여 마전동 고개 남서쪽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격렬한 전투 이후 호주군에 대한 압박은 자정 이후 예상치 않게 중단되었고, PVA 병력들이 철수를 시작하는 것이 관찰되었다.[1]

02:00까지 PVA의 공격은 저지되었고 3 RAR은 마전동 북쪽 철도 건널목 주변 논밭으로 새로운 위치로 재배치되었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 중대의 정확한 배치는 밤새 불분명하게 남아 있었다. 호주군의 사상자는 12명이 사망하고 64명이 부상당했으며, 이는 북한으로 진격하는 동안 발생한 전체 사상자와 같은 수였다. 연대 소속 장교들은 나중에 교전 중인 상황에서 철수하기로 한 결정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이는 위험하고 불필요했다고 생각했다. 상세한 계획, 정찰 및 명령의 부족 또한 이어진 혼란의 요인으로 간주되었다.[1] A 중대는 명령에 따라 즉시 철수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제2차 호주 제국군의 경험 많은 베테랑이 지휘하는 B 중대와 D 중대는 더 유리한 상황이 올 때까지 철수를 연기했고 그 결과 더 나은 결과를 얻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D 중대에서 파견된 정찰대가 버려진 A 중대와 B 중대의 위치를 ​​무저항 상태로 정찰했다. 그 지역은 PVA의 시신과 장비로 널려 있었다. 사상자 중에는 PVA와 조선인민군(KPA)이 모두 있었으며, 호주군이 혼성 부대의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며, 그 규모는 1,500명으로 추산되었다. 사망자 중 다수는 또한 폭파 장치를 휴대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1]

전날 밤의 사건에도 불구하고 호주군은 여전히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고, D 중대는 나머지 연대와 고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덕 63번지에 있던 이전 PVA 거점을 계속 점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B 중대와 C 중대는 각각 도로 동쪽과 서쪽의 논밭에 위태롭게 배치되어 있었고, 날이 밝자 높은 지대에 있는 PVA 위치에 노출되었다. 같은 날 코아드 준장은 3 RAR을 방문했다. 연대의 배치에 불만을 품고 지휘관에 대한 신뢰를 잃은 그는 월시 중령을 해임하고 부지휘관인 브루스 퍼거슨 소령을 그의 자리에 임명했다. 월시 중령은 미 제8군 사령부로 복귀했다. 퍼거슨 소령은 연대 지휘를 맡기 위해 나섰다. 3 RAR에 참호를 구축하라고 명령한 그는 몇몇 정찰대를 파견했고, C 중대는 D 중대에서 북동쪽으로 2.2km 떨어진 도로를 내려다보는 언덕으로 무저항으로 진격했다. 꼭대기에 도착한 호주군은 PVA가 계곡 위로 북쪽으로 철수하는 것을 관찰했다. 더 동쪽에서는 PVA가 미 제19 RCT를 공격했다. 그러나 11월 6일 오후에 박천 주변의 PVA 철수는 일반적인 철수의 일부임이 분명해졌다.[1]

4. 전투 이후

박천 전투 이후, 영연방 제27여단은 전사자 12명, 부상자 70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부상자 대부분은 호주군이었다.[72]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된다.[72] 호주군은 중공군 전사자가 200명, 부상자가 20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72] 왕립 호주 연대와 아르길 앤드 서더랜드 하이랜더 연대는 이 전투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박천" 전투 명예를 수여받았다.[77]

11월 7일, 미군과 영연방군은 중공군의 철수를 확인하고 제한적인 수색 작전을 펼쳤다.[71] 호주군은 정찰 중 중공군 7명을 사살하고, 조선인민군(북한군) 대대와 교전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78] 이후 영연방군은 북쪽으로 진격하며 11월 7일 밤에서 8일 밤 사이에 계획된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저지했다.[78] 11월 9일, 진격 방향을 북서쪽으로 바꾸어 박천 주변에서 추가적인 정찰 및 포로 확보 작전을 수행했다.[80] 11월 11일부터 영연방 제27여단은 북쪽으로 천천히 진격하여, 11월 16일에는 박천 북쪽 3km 지점의 대령강 굽이에 있는 117고지를 점령했다.[81] 이후 몇 주 동안 박천 지역에서 정찰 활동을 계속하며 소규모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과 충돌했다.[31]

언덕 꼭대기에 배치된 보병, 배경에선 전차가 지원을 제공.
박천-신의주 도로 전투 중 미국 전차와 함께한 제3왕립 호주 연대 C중대, 1950년 11월 7일


겨울이 다가오면서 혹독한 추위가 찾아왔고, 이에 대비하지 못한 호주군은 건강 문제를 겪었다. 얼음과 눈 속에서 작전할 훈련과 장비가 부족하여, 추가적인 미국 방한복과 장비가 지급되기 전까지 어려움을 겪었다.[74]

11월 24일, 유엔군은 공세를 재개했지만, 11월 25일 밤 중공군의 2차 공세가 시작되면서 청천강 전투장진호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74] 미군은 북한에서 철수하여 38선으로 후퇴했고, 영연방 제27여단은 초기 공격을 피했지만, 결국 유엔군의 혼란스러운 철수에 합류해야 했다. 제3왕립 호주 연대는 9일 만에 320km를 후퇴하여 1950년 12월 11일 의정부에 도착, 의정부 전투에서 방어선을 점령했다.[74]

4. 1. 피해

영연방 제27여단은 이 전투에서 12명이 전사하고 7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부상자 대부분은 호주군이었다.[72] 중국 인민지원군의 사상자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많은 사상자들이 전장에서 수습되었다.[72] 우신취안 중국 인민지원군 제39군 사령관에 따르면, 제117사단 제350연대의 보병 중대가 영연방 제27여단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73] 호주군은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이 전사자 200명, 부상자 200명으로 추정했다.[72]

왕립 호주 연대와 아르길 앤드 서더랜드 하이랜더 연대는 이후 "박천" 전투 명예를 받았다.[77]

4. 2. 후속 작전

11월 7일, 미국 제24보병사단과 영국 연방 제27여단은 중공군의 철수에 뒤이어 제한적인 수색 작전을 실시했다.[71] 같은 날 아침, 호주 정찰대는 중공군 병사 7명을 사살했고, 이후 제3왕립 호주 연대(3 RAR)는 여단의 나머지 부대와 함께 진격을 준비했다. C중대는 동북쪽으로 2.5km 떨어진 74고지를 큰 저항 없이 점령했으나, 반대편 사면에서 조선인민군(KPA) 대대와 마주쳤다. 호주군은 기관총 사격으로 조선인민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5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조선인민군은 포병과 공습을 받으며 탕동으로 후퇴했다. 나머지 대대는 오른쪽으로 이동했고, 아길 연대는 더 북쪽에 있는 두 개의 언덕을 점령했다. 여단의 이러한 진격은 11월 7일 밤에서 8일 밤 사이에 계획된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저지했으며,[78] 이전 전투에서 다수의 중공군 전사자도 발견되었다.[79] 11월 9일, 진격 방향은 박천 주변에서 북서쪽으로 바뀌었고, 제3왕립 호주 연대는 동쪽으로 3km 더 전진하여 거의 저항 없이 다수의 포로를 확보했다.[80] 11월 11일부터 영국 연방 제27여단은 북쪽으로 천천히 진격했다. 11월 16일, 제3왕립 호주 연대는 박천 북쪽 3km 지점의 대령강 굽이에 위치한 117고지를 점령했다.[81] 이후 몇 주 동안 부대는 박천 지역에 머무르며 대대 규모의 광범위한 정찰 활동을 벌였고, 소규모 중공군 및 조선인민군과 충돌했다.[31]

겨울이 다가오면서 눈과 강풍이 부는 혹독한 추위가 찾아왔다. 극심한 추위에 대비하지 못한 호주군은 특히 연대 고령자들을 중심으로 건강 문제를 겪었다. 얼음과 눈 속에서 작전하는 데 필요한 훈련과 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에, 추가적인 미국 방한복과 장비가 지급되기 전까지 정비 또한 어려운 문제였다.[74]

11월 24일, 유엔군은 중공군이 2차 공세를 시작하기 직전에 공세를 재개했다.[74] 11월 25일 밤, 중공군 제13집단군은 일련의 기습 공격을 시작하여 청천강 전투에서 미 제8군을 청천강까지 밀어냈다. 중공군은 한국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미 제8군의 우측에 있던 미국 제2보병사단을 궤멸시켰으며, 미 제8군은 남쪽으로 북한 철수를 시작했다.[83] 이와 동시에 중공군 제9집단군은 장진호 전투 근처에서 미 제10군단을 매복 공격했다.[84] 미 제8군은 포위망을 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미 제10군단은 1950년 12월에 흥남 철수를 해야 했다. 맥아더 군대는 북한에서 축출되어 38선으로 후퇴했고, 그곳에서 다시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다.[85] 중공군의 새로운 공세가 시작될 때 예비대로 있던 영국 연방 제27여단은 초기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공세로 인해 유엔군은 곧 혼란스러운 철수를 해야 했다. 제3왕립 호주 연대는 9일 만에 320km를 후퇴하여 1950년 12월 11일 서울에서 북동쪽으로 24km 떨어진 의정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영국군과 호주군은 의정부 전투 동안 한국 수도의 북쪽 진입로를 확보하기 위해 방어선을 점령했다.[7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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